이상주의자의 처절한 실패 다이어리


여기가 끝인가
이 내 모진 목숨.

8년전 공연 우루왕에서 바리공주에게 주었던 가사다.
오래전이라 다른 부분은 죄다 까먹었지만
유독 이 부분만은 가끔씩 흥얼거리곤 했었다.
여기가 끝인가, 이 내 모진 목숨.. 하고 흥얼거리면서
내게도 바리와 같은 기적이 일어나길 바랬던게 아닐까 싶다.

추모광풍이 불었던 일주일 내내
궁금했다.
여기가 끝일까?

사람냄새 나던 그의 서거소식을 들었던 첫날,
멍했고, 두근거렸고, 착잡했으며, 마음은 중심을 잃고 흔들렸다.
어떤,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크게 요동치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확신할 수 없어서,
그 요동치는 감정에 몰입할 수가 없었다.
감정의 과잉을 경계하는 버릇 때문이다.

나는 과잉된 감정으로 밥벌어 먹고 사는 사람들과 어울려 산다.
이건 삐딱하고 자학적인 내 방식의 표현이다.
존중하자면, 이렇게 말해야한다.
나는 민감하고 섬세한 감각으로 시대를 감지하고 시대를 대신해 앞서 외치는 사람들과 어울려 산다.

예술가들의 지향점은 그렇겠지만, 현실은 그리 아름답지 않다.
나 역시 솔직해지자면 육체노동 대신 '과잉된 감정'의 한쪽 끝을 잡고
그 감정이 생산하는 언어와 훈련된 기술로 
간신히 내 밥벌이를 하며 사회적 존재감을 인정받고 사는 부류일 뿐이다.
두렵도록 퍽퍽한 현실 속에서도 기어이 놓지 못하고 꿈꾸고 있는 신화가 있다는 것이
내가 나를 용서하고 다독이는 유일한 이유다.
이 무용해보이는 직업을 버리지 않는 이유다.

그래서,
감정의 과잉을 더 차갑게 경계하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감정의 과잉은 곧 왜곡과 비본질적 이해와 무책임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삶을 통해 확인해 왔기 때문이다.

지난 일주일,
사실 나는 마음이 복잡했다.
오백만의 자발적 추모객, 전혀 예상치 못했던 거대한 통곡과 외침을 바라보며
그리고, 그들의 움직임을 재빠르게 계산해 가격표를 매기고,
새로 매긴 (예상 외의 높은) 가격표에 따라 슬픈 음악과 멋진 영상과 뭉클한 문장으로 떠들어대는
방송사와 언론의 행태를 보며
불편했다.

깊고 진실한 추모와 애도조차,
본질을 들여다볼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 뿜어내는 과잉된 감정,
그 뻔뻔하고 경박한 선정성에 묻혀버리는 것이 불쾌했던 것 같다.
   
서거 둘째날,
아무도 없는 방에서 혼자 큰 소리로 울었다.
비로소 내 요동치는 떨림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불완전한 이상주의자의 처절한 실패'
그것을 확인해버렸다는 절망때문에 목놓아 울었다.

이 시대는 '내가 어떤 이상적인 세계를 지향하는지' 보다
'내가  그 이상향을 구현할 만큼 완전한 인간인지'에만 집중한다는 확인을 하고보니
그의 실패는 더이상 그만의 실패가 아니었고
맥이 풀리다 못해 두렵기까지 했다.

기업 경영자가 되어버린 기독교 목사들은
'신이 아니라면, 신적인 세계를 꿈꾸지도 떠들지도 말라'는 잔인한 선언을 하듯
한 실패자의 죽음을 가벼이 치부하고 심지어 조롱한다.
부끄러움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
그 인간적인 진실함마저 조롱하는 세상이 두려운 것이다.

자칭 세계와 인간에 대해 공부하고 고민하며 더 나은 세계를 위해 애쓴다는 자들 역시 다를 바 없다. 
예리하게 그의 불완전함에 확대경을 들이대며, 실제로 틀리지 않은 정세를 판단하는 사람들을 보며
어쩌면 내가 해낼 수 없을지도 모르는 좋은 꿈을 꾸는 것마저도 불안해졌다.

필연적으로 불완전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이 
이상적인 것을 꿈꾸며 섣부르게 확신에 찬 행동을 하다가
그런 행로 속에서 자신이 가진 결함이 드러나는 순간이 오면
그래서 그가 가진 결함 때문에 그가 꾸었던 꿈에 도달하지 못하면
그 실패의 댓가가 이토록 잔인한 모욕이라면
애초에 '아무말도 하지 않고, 아무 꿈도 꾸지 않고, 아무것도 선언하지 않는 것'이 가장 안전한 삶 아닌가 하는
비겁한 생각이 들어버린 것이 슬퍼서
몇시간을 울었다.

그리고 돌아본다.
내가 동의하고 반가워 했던, 노무현이라는 사람의 지향점과
노무현이라는 불완전한 인간이 가졌던 결함에 대해
적절한 태도를 가졌었나.

예상 못했던 500만의 애도는 그런게 아닐까.
기대에 못 미치는 그의 인간적 결함 때문에
그가 지향했던 꿈의 진실성 마저 의심하거나, 그 지향점의 가치마저 가벼이 외면했던
때늦은 후회.
오직 그 미안함의 눈물만이 희망이 아닐까 싶다.

내가 동의 했던 가치가 있다면,
그 가치를 지키는 것은,
그것을 큰 소리로 처음 말한 자의 몫이 아니라,
그 가치를 동의했던 내 몫이어야 했음을,
그의 죽음을 통해 통렬히 깨닫는다.

결코, 그 가치를 먼저 큰 소리로 먼저 말한자의 인간적 결함을 미워하며 비난하는 것으로는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을.
그의 인간적인 결함을 메워주는 것이, 그 가치를 동의했던 사람들이 했어야 할 일이라는 것을.


한바탕의 통곡,
그것이 끝일까?
정말로, 여기가 끝일까?
다시, 무언가, 어떤 이상적인 가치를 큰 소리로 떠드는게, 두렵지 않은 세상을 꿈꿀 수 있을까?

마음의 중심을 읽어 그의 존엄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그 마음의 중심에 위배되는 결함에는 단호해질 수 있는
그런, 건강하고 사람냄새 나는 세상을 꿈꾼다.
비열한 모욕이 부끄러운 야만이라는 것이 상식이 되는 세상을 꿈꾼다.
그래서, 여기저기, 무책임하더라도 이상적인 지향을 외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기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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