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럽다. 공책

나는 깨진 독입니다.

나는 선량한 얼굴로 물 한바가지 들고 내게 오는 사람들이
반갑지 않습니다.

그들은
깨진 독에 물붓기라는 허무한 노동 끝에 지칠것이고
그렇게 지쳐버린 후에야 
내가 깨진 독이라는 걸 알아챌 것이며 
이미 지쳐버렸기에 더이상 내게 호의적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반드시 내 깨진탓을 하며 돌아섭니다. 
저렇게 망가진 독인줄 내 몰랐네
배신이네, 아픔이네, 상처네 하며.

그렇다고 내가 무슨 엄청난 꿈을 꾸는것도 아닙니다.
깨진 독을 이어붙이는 것,
그것은 하늘의 일이지 사람의 일은 아닙니다.

나는 깨진 독입니다.

나는 그저,
나 깨어져 산산조각나있음을 알아보고
나 이미 오래전부터 깨어져있었다는것에 가슴 아파 
눈물 흘려줄 사람을 기다립니다.

나는 깨진 독입니다.
내 곁을 지날때,
손베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2003년. 홈피에 썼던 글. 
부끄럽다. 여전히, 아니, 더욱 산산조각나 있어서. 
깨어진 조각들의 날카로운 면을 그저 좀 무디게 만든것이 다여서.
이제는 이렇게 당당히 내 결함을 말하기도 부끄러운 나이가 되어버려서. 

덧글

  • 닉네임 2012/03/04 15:25 # 삭제 답글

    10년전 글이네요. 깨진독이나 안깨진독이나 모두 독인것을 지금 서서이 느끼고 있읍니다. 이젠 치열함이 물감통처럼.....
  • 기윤아빠 2012/05/09 19:21 # 삭제 답글

    트윗 글 보고 왔네요..

    영혼이 아름답다는 생각.
    그리고..

    "당신의 은총을 감추며 사십시오." - 준주성범


    언젠가 저에게도 산디아노 순례 기회가 있겠죠?

    다녀오거든 같이 막걸리 한잔 합시다..

    난, 인생이 시지프스에게 내려진 형벌 같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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