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시. 공책

 

가만히

쳐다보았다.

 

내장터진 비둘기의 사체같은 시절을,

식탐을 가진 술꾼이 게워낸 토사물같은 그것을.

 

못 본체 눈 감고,

없다 없다 최면을 거는 동안

그것들은 썩고 곪아 악취를 풍겼다.

 

아무리 두려워도

이를 악물고 쓰레기부터 치웠어야 했다.

용기 낼 수 없었기에

그 오랜동안 악취에 이를 악물어야 했다.

 

이도 상하고.

잇몸도 상하고.

모든 것이 마비되어 버릴즈음.

 

바닥이란 것도 느낄 수 없을만큼 바닥을 친 후에야

나는 비로소 내가 무엇을 응시해야 하는지 알았다.

 

끔찍한 것을 

가만히 응시하기 위해서는

신의 도움과 시간이 필요하다.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가만히 응시하려면

먼저, 그 끔찍한 것을 사랑해야 하니까.

 

모든 것이

제 때, 제대로 일어난 것이다.

 

이제껏 내가 목숨처럼 붙들고 있던 지도는

이제 쓸모 없어졌다.

 

희생과 인내로 어렵게 얻어낸 그 지도를

지나치게 신뢰했기 때문에

나는 내 지도가 일러주는 세상 바깥으로는 

한발짝도 나올 수 없었다.

지도에 대한 신뢰가 신념으로 바뀌는 것도 몰랐다.

내가 어느 누구에게도 길을 묻지 않게 되었다는 것도 몰랐다.

 

지도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다.

어떤 사랑도 기호로 그려넣을 수 없었기에.

 

두려운 마음으로

지도를 찢었다.

그리고,

마음이 가는대로 산을 넘었다.

 

큰 산을 넘었더니

전혀 낯선 마을이 보인다.

 

그 마을, 참 평화로워 보인다.

 

이제. 지도 대신.

만나는 누군가에게. 길을 물으면 되는 것이다.

 

잊고 있었다.

나는 갈 데가 없다는 걸.

그냥, 놀다보면 이르게 되는 곳.

나는 처음부터 그곳으로 가고 싶었던 것이다.




-2007년 1월 27일. 우울증 바닥을 치던 때.




덧글

  • 2011/07/14 04:11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Lemon 2012/03/08 02:26 # 삭제 답글

    트위터 글에 많이 공감했어요. 뭔가는 모르게 감사했구요. 그래서 굳이 찾아와 덧글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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