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여자, 거트루드 공책

<왕의 여자, 거트루드 >


-존재냐 비존재냐, 그 본질적인 고뇌의 질문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세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한편인 '햄릿'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원작을 읽지 않았어도, 혹은 공연을 본적 없는 사람도 

저 유명한 대사-"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를 

어디선가 들어본적이 있을 것이다.

 

흔히,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번역으로 많이 알려진 저 대사는 

<햄릿> 3막1장에 나오는 햄릿의 유명한 독백이다. 

그리고 이 '3막 1장'은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두 여자, 

햄릿의 어머니인 '거트루드'와 햄릿의 애인인  '오필리어'가 함께 등장해 

퍽 흥미로운 사건을 일으키는 부분이다.


햄릿이라는 작품이 굉장히 유명하다는 것만 알뿐,  

햄릿의 구체적인 줄거리를 정확히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작품 전체를 한번 살펴보자.  



-거기, 대체 누구인가? 물으며 시작하는 극

-"Who's there?"


햄릿은 덴마크의 왕자다. 

외국 유학중에 아버지(선왕)의 부음을 듣고 급히 귀국했으나,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흘린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어머니(거트루드)와 작은아버지의 결혼식을 봐야했다.


극의 시작은, 어둔밤 보초를 서던 파수병이 죽은 '선왕'의 유령을 보는데서 시작한다.


-"Who's there?"

"거기, 누구요?"


햄릿 작품의 첫 대사, '거기, 누구요?'는 

작품 전체의 주제를 관통하는 의미가 있는 말이다.


어두운 암흑 속, 

무언가 할말이 있는것 같은 선왕 유령을 본 파수병들은 

유령의 아들 햄릿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로 한다.  


아버지 선왕의 갑작스런 죽음도, 

어머니와 작은아버지의 재혼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햄릿은 선왕의 유령을 만나고, 

유령이라는 불가해한 존재로 인해 

어둠 속에 가려져있던 '끔찍한 진실'을 직면하게 된다.

 

선왕의 유령은 자신이 알려진바와 같이 

정원의 독사에게 물려 죽은것이 아니라, 동생에게 독살 당했음을 알리면서, 

아들 햄릿에게 자신의 모든것-생명, 국가, 아내-를 한꺼번에 빼앗아간 동생(현왕)에게 복수를 하라고 명령한다.


온 정신이 무너질듯 괴로워하는 햄릿은 선왕 유령에게 복수를 약속하고, 

그때부터 미친척하기 시작한다. 

광증을 보이는 햄릿을 걱정하는 어머니 거투르드, 

그리고 그런 햄릿의 존재에 위협을 느끼고 그를 없애려고 하는 

작은아버지이자 아버지가 된 현왕 클로디어스.

 

복수를 위해 광증으로 위장한 햄릿은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한 연극을 무대에 올리며 현왕의 반응을 보고 그의 죄를 확신하고, 

실제로 미칠것 같은 분노 속에서 어머니 거트루드를 몰아세우다가, 

의도치 않게 사람을 죽이게 된다.


한때 열렬히 사랑했던 오필리어의 아버지이자, 현왕의 측근인  

폴로니어스의 살해범이 되어버린 햄릿은 영국으로 추방당하고, 

현왕은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햄릿을 아무도 모르게 죽여달라고 영국의 왕에게 부탁한다.  


한편, 변해버린 햄릿에게 상처받은 오필리어는 

햄릿의 손에 아버지마저 죽음을 당하자, 그 충격에 정신을 놓아버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데, 

왕의 계략에서 살아남아 홀로 본국으로 돌아온 햄릿은 이 사실을 알고 괴로워한다.


햄릿이 살아 돌아오자 극도로 불안해진 왕은 두번째 계략을 실행한다.

여동생과 아비를 잃은 레어티즈의 분노를 이용해 결투의 장을 열고, 

독이 든 술과 독을 바른 칼로 햄릿을 처치하기로 한것이다.  


그러나, 독이 든 술은 왕비가 마시고, 

독검은 햄릿과 레어티즈 모두를 베었으며, 

햄릿은 마지막 힘을 다해 이 모든 음모와 계략을 주도한  클로디어스를 죽인다. 

그리고, 저 유명한 마지막 대사를 읊조리며 쓰러진다.


"The rest is silence."

"이제 남은 것은, 정적 뿐."



이 광풍같은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중요한 두 여자가 있다.

하나는 햄릿의 어머니이며, 선왕의 여자였고, 현왕의 여자이기도 한 거트루드.

그리고, 햄릿의 애인이었으나 그에게 모욕당하고 아버지마저 잃은 후 죽음을 선택한 여자 오필리어이다. 


세익스피어 시대가 허용했던 여성의 사회적 지위 혹은 문화적 관습은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과는 확연히 다를 것이다. 

그러나, 고전이 된 모든 명작들은 언제나 시대와 문화를 뛰어넘는 

인간의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고민과 갈등을 담고 있다. 

이 작품 <햄릿> 역시 그렇다. 


부정, 부당한 행위, 복수같은 강력한 담론이 지배하는 전체 극 속에서, 

거트루드와 오필리어라는 두 여자 캐릭터는  

상대적으로 수동적이고 나약해보일 수도 있지만, 

극이 집중 조명하지 않는 두 여인의 시간을 촘촘히 상상해 읽어가다보면, 

'존재와 비존재'에 대한 주인공 햄릿의 고뇌만큼이나 

이 시대에 유효한 명작의 향기가 두 여인에게도 배어있다.



-'왕자'의 '어미'보다는 '왕'의 '여자'였던 여인


햄릿의 극중 나이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여하간 햄릿은 '왕자'다. 

아직은 '왕'이 아닌, 아직은 '왕'이 되지 못한 사내. 

다시 말해 아직 '어른 남자'의 권력을 가지지 못한, 권력자의 '아들'이기만 할 뿐인 햄릿. 


그러나 햄릿의 어머니 거트루드는 어떤가. 

'왕자의 어미'이기도 하지만, 

그녀가 그것보다 더 분명하게 욕망하며 지켜낸 것은  

'왕의 여자'라는 정체성이다. 


자신을 그토록 극진히 사랑해준 선왕이 갑작스럽게 죽어 사라졌으나, 

그래서 더이상 '왕의 여자'일 수 없는 위기에 처했으나, 

아비를 잃고 혼란과 비탄에 빠진 왕자와는 달리, 

그녀는 그 다음 '왕'이 된 사내를 자신의 남자로 받아들이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왕은 바뀌어도, 그녀는 변함없이 왕의 여자다. 

자신의 그런 선택이 왕자 햄릿을 불편하게 한다해도 

아들의 비난쯤은 아직 뭘 모르는 어린애의 투정쯤으로 여기며 

당당히 왕의 여자로 사는 거트루드.


그녀의 첫 대사는 이런 내용이다. 


"햄릿, 이제 그만 얼굴 펴고 새 아버지를 향해 웃어라. 

네 아비는 이미 죽었고, 산 사람은 모두 언젠가 죽는거야. 넌 왜 그렇게 유난을 떨지? "


시쳇말로, 쿨하다.

인생을 알만큼 알것 같은 여자, 거트루드.

사람과 사람이 서로에게 어떤 의미와 어떤 관계로 엮여있든 간에, 

지금 현재 '죽은것과 산것' 혹은 

지금 현재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의 의미를 

분명히 알고 있는 사람의 말이다. 


아들 햄릿이 극 전체를 통해 고민하는 '존재냐 비존재냐'는 질문에 대해 

'어른 여자'인 거트루드는 일찌감치 자기만의 대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아직은 왕이 되지 못한' 아들 햄릿이 

자신이 알고 있는 세상의 법칙을 순순히 받아들이기를 바란다. 


살인까지 일어나는3막4장의 거트루드와 햄릿의 극한 갈등은 

이런 세계관의 갈등과 대립이다. 

그녀가 '왕의 여자'가 아니라 '왕자의 어미'로 있어주기를 바라는 햄릿은

3막 4장에서 제 어미에 대한 애증의 분노와 혐오를 감추지 않는다. 


'대체 무슨 마귀에 홀렸기에 이렇게까지 망령을 부리느냐'고 화를 내고, 

'찬서리에 정욕을 식힐 나이의 여인이 뜨거운 정욕에 불탄다'며 비난을 시작하더니, 

그 표현의 강도를 높여 

'개기름이 푹 밴 더러운 땀투성이 이불 속에서 추악한 사음에 빠져 

추잡스럽기가 돼지같은 숙부와 시시덕거리는' 어미를 구체적으로 비난한다. 


아들의 폭언과 울부짖음에 괴로워하면서도 

'내가 뭘 어쨌다고 내게 이러는 것이냐'며 반발하는 거트루드. 

폐부를 찌르는 폭언으로 어머니를 공격하던 햄릿은 결국 

끝내 자신의 정체성을 바꿀것 같지 않은 어머니 거트루드에게 

간절히, 그리고 너무나 구체적으로 애원한다.  


"숙부의 잠자리로 가지마요."

"오늘밤만 참아보세요."


끔찍한 모자간의 갈등, 

실수로 오필리어의 아버지 폴로니어스를 죽이고도 전혀 개의치 않는 햄릿의 광적인 분노, 

심지어 선왕의 유령까지 등장해 거트루드를 그렇게 몰아세우지 말것을 당부하는 

이 폭풍같은 3막4장의 끝에, 


거트루드는 비로소 '혼자' 방에 남아 '흐느낀다'. 



이 때 거트루드가 흘리는 눈물, 

누구한테 보이려고 흘리는 눈물이 아닌 

혼자만의 울음은 무엇 때문일까. 

그리고 그 울음은 얼마나 깊고 광범위한 절망을 담은 울음일까.

 

이것은 3막 4장 이전까지 그녀가 했던 여러 선택들을 

어떤 의미로 읽고 무엇에 공감했는지에 따라 

매우 다른 깊이로 받아들일 수 있는 장면이다. 


혼자만의 방에서 비로소 꺼내놓는 거트루드의 흐느낌에서, 

요구받은 대로 살지 않고 자신의 욕망대로 살고자 하는 

많은 여자들이 겪는 피곤과 절망의 순간을 본다. 


어느 시대에나 관습적으로 요구되는'어머니'의 삶. 

그 이상의 '여자'로 살고자하던 한 여자가 감수해야하는 

저 무참한 비난과 상실에 대해 오래 생각이 머물면, 

점점 그녀의 흐느낌에 감정적으로 공감할 수 밖에 없다. 


거트루드의 흐느낌은 단지 '여성'의 문제를 떠나, 

요구받는 대로 살것인가 욕망하는 대로 살것인가를 결정하는 

한 인간이 겪는 고달픔에 대한 표현이다.


막강한 권력이 없는 지위에서 자신의 '욕망'을 선택했을 때 감당해야 하는 비난과 고난은 

세익스피어 시대나 지금이나 본질적으로 크게 다를 것 없고,  

자신의 '욕망'을 선택했기 때문에 울어야 하는 일이 

남자에 비해 상대적 약자인 여자들에게 좀 더 많이 일어나는 현실 역시 

세익스피어 시대와 오늘이 크게 다르지 않은것 같다.



-세종, 문화공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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