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필리어,
비련(悲戀)과 비정(非情) 사이, 소녀의 비극
-비련의 이미지와비극적 존재감
<햄릿>에는두명의 여자가 등장한다.
지난 글에서 살펴보았던 '거트루드'가 왕의 여자였고 왕자의 어미였다면,
흔히 '오필리어'는 '비련의여인'으로 회자된다.
애인에게 버림받고, 그 애인의 손에 아버지를 잃고,
정신을 놓아버린채 물속에 잠겨 생을마감한 아름다운 처녀 오필리어.
그녀에게 일어난 일들로 미루어 볼때,그녀는 확실히 상처받고 파괴된 비극적 여인이다.
그래서인지 오랜세월 수많은 화가들이
이 가련한 여인 '오필리어'에 관한 많은 작품들을 남겨왔다.
그녀의 슬픔, 그녀의 광기, 그녀의 마지막 순간을 그린 많은 다양한 그림들을 보면
'오필리어'라는 여자가 가진 비극성은 많은 예술가들에게 강력한 영감을주기에 충분했던것 같다.
이처럼 비련의 상징, 상처받은 순수의 이미지로 박제화된 '오필리어'를
<햄릿> 극텍스트 안에서 다시 꼼꼼히 읽어내보자.
실제로 그녀가 겪은비극은 무엇일까.
완성도 있는 극 속에서 제대로 그려진 '인물'은 결코 '이미지'나 '정서'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선택하고 행동하며 그 행동이 가져온 결과에영향받는 것, 그것이 '극적 인물'이다.
오필리어는 극적 인물이고,
그 극은 의심할바 없는 최고의극작가에 의해 쓰여진 완성도 높은 작품이다.
이 극에서 '오필리어'를 그저
'남자들의 힘과 세계에 의해 가련하게 파괴된 순수의 상징'으로만 읽고
그 이미지를 소비하는 것은
어쩐지 세익스피어에 대한 예의가 아닌것 같다.
'오필리어'는 대체 무엇을 선택했길래, 그토록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되었을까.
-'의심', 그녀의 첫 선택
"No morebut so?"
정말 그것 뿐일까요?
1막 3장에서, 유학을떠나는 오빠 레어티즈가
여동생 오필리어에게 햄릿왕자와의 관계를 처음으로 언급한다.
"햄릿왕자가 네게 호의 같은 걸 보여오신 모양인데
그건 다 한 때의 기분, 청춘의 혈기에 불과하다.
일찍 피고 일찍 지는 이른봄의 제비꽃처럼,
덧없이 사라지는 향기, 일시적인 위안, 그것뿐이야."
"정말, 그것뿐일까요?"
햄릿을 경계하라는 오빠의경고에 오필리어의 첫 반응은 '반문'이다.
확신이 없어서 강력하게 거부하거나 오빠를 설득하려고 들지는 못하지만,
햄릿의 진심을 무가치하게 여기는 오빠의 경고를 흔쾌히 받아들이기도 마뜩찮기에,
오필리어는 오빠의 경고 그대로 다시 되물으며 머뭇거리고 있다.
영악하지 못한 여동생에게던지는 레어티즈의 경고는 간단하다.
햄릿은 왕자라는 신분 때문에 '사랑'은 쉽고 '결혼'은 까다로울것이니,
사랑이라는 불확실한 감정에 몸을 맡겨 여인의 정조를 잃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정조'를 여인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인식하는 사회적분위기는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지는 매우 강력한 이데올로기다.
하물며 이 극이 쓰여진 시기의 사회적윤리를 생각할 때,
레어티즈의 경고는 너무나 당연하고,
그 경고를 받아들이는 오필리어 역시 특별할 것이 없어보인다.
아직 오필리어의 비극은 시작되지 않은것 같다.
그러나 잠시 후 등장해,
레어티즈보다 한결 더 단호하고 엄하게 햄릿과의 관계를 질책하며 다그치는 아버지 폴로니어스가
'그의 말들을 믿느냐?'고 물었을 때, 오필리어는 아주 중요한 대답을 한다.
"잘 모르겠어요, 아버지. 어떻게 생각해야할지."
I do not know, my lord, what Ishould think.
오필리어 자신의 입으로 전하는 바에 따르면, 햄릿은 오필리어에게
'여러번, 진심을 다해, 신성한하늘에 대고 거짓없음을 맹세하며' 애정을 고백해왔다.
오필리어는 햄릿의 그런 태도를 보며 사사로운 만남을 이어오고 있었고,
그 사랑 혹은 관계에 희망을 가지고 있던것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그 사람의 말들을 믿느냐'는 질문에 선뜻 '그렇다'고 답하지 않는다.
햄릿의 사랑에 희망과 호감을 갖고 있으면서도,
오필리어자신은 아직 햄릿의 진심을 '믿지' 않고 있었다.
오필리어의 비극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것 아닐까.
이후에 벌어진 일들, 그녀가 하는 선택들은
단지 무력하고미성숙하여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 스스로 햄릿의 진심을 의심하던 여자였기 때문에,
그의 사랑을 시험해보기를 '선택'할수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수표같은사랑을 현찰인줄 알고 받는다면 넌 철부지 어린애다.
좀더 값비싸게 굴어라. 안그러면 내가 너로 인해 부끄러울것이야.
(중략) 너도 이제 다 큰 처녀답게 몸가짐을 도도하게 하며 상대를 대해야 한다.
(중략) 결론을 말하마.
이제부터는 절대로 잠시라도 햄릿과 만나지마라. 이건 명령이다."
세상사에 닳고 닳은 노인, 셈과 거래에 능한 아버지가 딸에게내린 명령은
단지 '햄릿과 만나지 마라'가 아니다.
'비싸게 굴고, 상대를 읽으라'는명령이었다.
다시 말해, 사랑이 아니라 게임을 하라는 조언이었고, 오필리어는 이 명령을 받아들였다.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아버지"
그녀는 햄릿이 자신에게 보내온 사랑의 편지를
별다른 설명없이 햄릿에게 다시 되돌려보내고,
만나자는 햄릿의 청을 거절한다.
'별이 빛나는지 의심하고, 태양이 움직이는지 의심하더라도 내 사랑은 의심하지 말아달라'고 고백하는 사내에게,
'살아있는한 당신의 사람이 되고싶다'며 한없는 사랑을 고백해온 사내에게,
오필리어의 거리두기는 참으로 단호해보인다.
햄릿을 사랑하지만, 어쩔수 없는 아버지의 명령 때문이었을까?
정말로 그것때문이었다면,
영문도 모른채 거절당해 상처받을 애인의마음을 헤아려
자신의 진심과 처지를 전했을 법도 하건만,
오필리어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
전적으로 아버지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다.
그것은 사실 아버지의 '명령'을 따른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가치관'을 따른 것이다.
햄릿이 그동안 자신에게 보여줬던 (그러나 증명할수도 확신할수도 없는) 그의 진심과 사랑을 믿는 대신,
아버지가 가르쳐준 '어른스럽고 현명한 세계'의 게임의 법칙을 받아들이기로 '선택'한 것이다.
이후에 보이는 오필리어의 태도는
그녀가 정말로 햄릿을 사랑하는지 의심하기에 충분하다.
- '사랑의 시험', 비극의 시작
2막1장에서,
선왕의 유령을 만난 이후 거대한 분노와 혼란으로 실성한듯 고통스러워하는 햄릿이
철저하게 망가진 모습으로 오필리어를 찾아온다.
오필리어의 눈에 보이는 햄릿의 모습은 "창백한안색으로, 두 무릎을 와들와들 떨면서,
소름끼치는 이야기를하기 위해 지옥에서 빠져나온 것같은 가련한 모습"이다.
그러나, 오필리어는 그토록 고통스러워하는 햄릿을 보고도
어떤 자발적인 반응도 하지 않았다.
한때 열렬한 사랑을 고백하던 사람의 지독한 고통에 어떠한 감응도 하지 않고,
그저 당황한 채 아버지에게 상황을 알릴뿐이다.
그 후, 셈이 빠른 폴로니어스가 햄릿의 변화를
자신의 딸에대한 상사병 때문이라고 오해한 다음부터 오필리어가 취하는 행동은
더욱 더 '사랑'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3막1장에서 오필리어는 몰래 엿보고 있는 아버지와 국왕부부를 위해
거짓으로 햄릿 앞에 나아가 그를 속이며 천연덕스럽게 연기를 하기도 한다.
햄릿이 얼마나자신을 사랑하는지를 다른 '어른들'에게 증명받기 위해,
'인생이란게 살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고민하며 실의에 빠져있는 햄릿의 아픔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과 '어른들'의 게임을 실행시키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그때쯤 햄릿은 오필리어의 변화를 눈치챈것 같다.
3막 1장에서 햄릿이 우연히 (사실은 폴로니어스에 미리 계획된 시험이었지만)
기도서를 읽고 있는 오필리어를 봤을때,
햄릿은 분명히 반가워한다.
그러나 오필리어가그동안 받았던 선물을 되돌려 주며
자기에 대한 사랑이 변했음을 확인하려하고 시험하려드는 태도를 보이자,
곧바로 햄릿도 태도를 바꿔 그녀를 모욕한다.
그녀의 태도에서 폴로니어스다운 계략을 눈치챘기 때문일것이다.
'수녀원으로가라'는 말 끝에 문득 햄릿은 오필리어에게
'폴로니어스가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묻고,
오필리어는 천연덕스럽게 '그는 집에 있다'고 거짓말을 한다.
그녀의 거짓 대답을 들은 햄릿은 그녀를 향해 더욱더 광기어린 폭언을 퍼붓는다.
일이 예상하던 바와 전혀 다르게 흐르고,
사람들이 보는앞에서 햄릿에게 큰 모욕을 당한 오필리어는
그제서야 자신이 "세상의 여인들 가운데 가장 비참한 처지가 되었다"며 슬퍼한다.
이전까지 한번도 '햄릿의 사랑을 잃을까봐' 걱정하거나
그 사랑을 지키기 위한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던 어린 아가씨 오필리어.
심지어 방금전까지 아버지와 국왕부부를 위해 연기를 하고 거짓말을 하며
햄릿의 감정을 시험하고 있던 오필리어는,
더 이상 햄릿에게 자신이 '소중하고 귀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자
비로서 자신이 비참한 처지가 되었다고 슬퍼하는 것이다.
-사랑을, 아버지를, 정신을, 그리고목숨마저 다 잃은.
상대의 진심을 믿고, 자신의 진심으로 소통해야 하는 '사랑의 법칙' 대신,
아버지가일러준 '거래와 게임의 법칙'을 따르려했던 오필리어는
제일먼저 사랑을 잃었다.
처음부터 의심없이 햄릿의 사랑을 믿고 계산없이 사랑했다면,
그래서 그 두 연인이 깊고 강력한 신뢰와 사랑을 유지하는 관계가 되었더라면,
어쩌면 오필리어는 햄릿의 폭풍같은 광기와 혼란의 시간을 함께 견디며
그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의미있는 동반자가 되었을 수도 있었을 테지만,
그녀는 불행하게도 햄릿의 고통과 혼란을 배가시키는 역할을 자처했고,
그 선택으로 인해 사랑을 잃었다.
그리고, 이미 잃어버렸으나 되찾고 싶었던 '사랑'의 손에
현실을 지탱해주던 '아버지'마저잃는다.
자신의 마음을 지배하던 두 세계가 격돌하고 갈등하다가
두 세계를 한꺼번에 잃어버리게 되자,
오필리어는 더이상 스스로 현실을 통합하고 받아들일 수 없게되어
온전한 정신을 잃고, 정신을 잃어버린 몸은 물 속에잠겨 숨도 잃어버리게 된다.
오필리어에게 일어난 비극은
외부로부터 느닷없이 찾아온 운명적인 비극인가?
혹은 특정시대, 특별한 사건에 한정된 특수한 비극적 사건인가?
그렇지 않다.
오필리어의 비극에서,
순수한 처녀의 짓밟힌 사랑의 슬픔보다는,
온전히 자기것일 수 있었던 '자신'을 지켜내지 못한 모든 인간이 겪게되는 보편적인 비극을 읽게된다.
그녀의 비참한 최후는
자신의 '믿음', 즉 스스로 믿는 바를,
스스로 믿어야할 바를 고집하고 지켜내며 통합하지 못하는 삶의 방식에 대한
작가의 냉정한 경고가 아닐까.
-세종, 문화공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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