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의 한편인 <오델로>의 줄거리를 한줄로 요약해 볼까.
<사악한 부하 '이아고'의 간계로 인해, 순결한아내 데스데모나의 부정을 의심하게 된 흑인(무어인) 장군오델로가 데스데모나를 살해한 후 진실을 알게되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한줄로 요약한 오델로의 줄거리는어쩐지 말초적 감각을 자극해 인기 몰이를 하는, 이른바 막장 드라마들과 별반 차이가 없어보인다.
확실히, 오델로는 다른 작품들-햄릿, 멕베스, 리어왕 등-과비교해 볼 때, 덜 거창한 소재를 다루고 있다. 왕위 계승이나거대한 권력 쟁취를 위해 인생을 거는 인물도 없고, 인생이 뭔지, 운명이뭔지, 대체 무엇이 옳은지 진지하게 사색하는 인물도 없다. 영웅적인주인공들이 아니기에 그들의 고민 역시 그 깊이와 무게감이 다른 작품들의 주인공의 그것과 비교해볼때 상대적으로 사소해보인다.
오델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체로 자기 자신의 욕망에 너무나 솔직하여 요즘말로 '찌질해'보일 지경이고, 자기 자신의 결함을 수시로, 무방비로 노출시키며 비극적 결말을 향해 치닫는다. <오델로>는 이러한 '미완'의인간들, '결함'의 인간들의 약점을 드러내고, 그 약점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며 서로를 파괴시켜가는지를 그린 극이다. 숭고하거나장엄한 주제로만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그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델로>는 가장 현실적인 인간의 허약함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그것을극적으로 집요하게 물고늘어지는 방식으로 인간의 본질을 드러낸 명작이다.
-데스데모나, 상함없는 영혼을 가진 여자.
<오델로>에 등장하는 온갖 허물 많고 세속적인인물군 속에 '데스데모나'라는 여인이 있다.
그녀는 <오델로>라는 비극에서 유일하게자신의 인간적 결함 때문이 아니라, 순수하게 죄없이 희생당하는 비극적 인물이다.
데스데모나는 베니스의 귀족, 원로원 의원의 딸이다. 젊고아름답고 신분도 높으니 남부러울것 없는 처녀였다. 그런 그녀가 오델로 장군을 사랑하게 된다. 오델로는 수많은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인정받는 무어인(흑인) 장군이다. 그러나곱게 자란 데스데모나와는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아온 사내인 것은 분명하다. 작품 곳곳에 그의 피부색을문제 삼는 많은 사람들이 있고, 온갖 전장을 누비며 살아온 세월동안 그는 꽤 거친 밑바닥 인생을 살아온것같다. 그런데, 모자랄것 없는 데스데모나가 오델로를 열렬히사랑하게 된다.
어떤 계산도 들어가지 않은 진정한 사랑이다. 그녀는 아버지의 눈을 속이며 몰래 오델로를 사랑했고, 급기야 아비의 허락도 없이 오델로와 결혼을 했다. <오델로>의 첫 장면은, 악당 이아고가 이 두 사람이 함께 밤을 보내고있다는 것을 데스데모나의 아버지에게 밀고하러 가는 데서 시작한다.
놀란 아버지는 오델로가 자신의 딸을 무력으로 납치했거나 속임수로 꾀어낸 거라고 여기며 분노하고 오델로에게 죄를 물으려고 할때, 오델로는 데스데모나와 자신의 관계에 대해 중요한 말을 한다.
"그녀는 제가 겪은 위험을 동정하여 저를 사랑했습니다. 저역시 그녀가 동정해 주는 어진 마음 때문에 그녀를 사랑하게 됐습니다."
뒤이어 나타난 데스데모나가, 진심으로 오델로를 사랑하기에 이미 결혼했다고 밝히자 그녀의 아버지는배신감으로 괴로워하면서도 그들의 결혼을 인정하고 모든 소란은 종식되지만, 오델로의 저 말은 시사하는바가 크다.
오델로는, 데스데모나가 자신을 동정하는 것을 고마워하고 있다.동등한 관계로 당당하게 사랑하는 사람의 고백같지는 않다. 데스데모나의 직접 증언이 있은후에야 소란이 종식되는 이 장면을 볼 때, 확실히 오델로는 데스데모나에게 걸맞는 사내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여러모로 기우는 결혼이었지만, 그것이 가능했고 행복했던건, 오델로의 당당함이나 능력 때문이 아니라 데스데모나의 적극적인 사랑 때문이었다.
그녀는 오델로가 의심을 시작하며 이유없이 화를 내고 전과 다르게 거칠게 대해도 자신의 선택을, 사랑을의심하지 않는다. 모욕감을 느낄법도 한 대우를 받고도, 오히려국사에 큰 일이 있어 마음이 어지러운 걸거라고 걱정하며 자신을 책망한다.
"손가락 하나가 아프면 다른 건강한 데까지 아픈것처럼 느껴지는 법, 남자도 신처럼 완결무결하지는 않아. 신혼때처럼 마냥 애지중지해주리라기대했다면 내 지나친 욕심이겠지. 내 잘못이야. 전지에 동반할병사로는 내가 자격이 없었던것 같아. 괜히 마음 상해서 그를 험구하다니. 이제 알겠어. 내 잘못이야. 그이는죄가 없어."
참으로, 사랑을 하려면 이렇게 해야하는 거다, 알려주는여자 같다. 그러나, 오델로는 어떤가.
그녀를 향해 "내가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 영혼이 지옥으로 떨어져도 좋다"고 외친 바로 직후, 이아고의 의미없는 질문 하나로도 모든 것이 무너지는 사람이다.
의미심장하게도, 이아고는 이 때 엄청난 거짓 정보를 흘리지도 않는다. 다만, 캐시오와 데스데모나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혼잣말처럼 "저건또 무슨 짓이지?" 중얼거렸을 뿐이고, 캐시오와데스데모나에 대해 "저 둘이 원래 서로 잘 아는 사이지요?"하는굉장히 당연한 질문을 했고, 그 뒤에 살짝 "아무것도아닙니다, 그저 생각나는 것이 있어서"라고만 했을뿐이다.
그런데 이때부터 오델로는 집요하리만치 이아고에게 달려들어, 그가 말하지 않는것이 무엇인지를 캐묻고궁금해한다. 그런 오델로에게 천하의 악인 이아고가 하는 말은 아이러니하게도, 너무나 옳은 말, 정말로 오델로가 꼭 들었어야만 하는 말이다.
"장군님. 질투를 경계하셔야합니다. 질투란 녹색눈의 괴물, 사람의 마음을 먹이삼아 즐기는 놈이죠. 아내의 부정을 알면서도 체념하고 아내에게 미련을 갖지 않는 남자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면서도 의심하고 의심하면서도 열렬히 사랑하는 남자는 정말 일분 일초가 얼마나 저주스러운가요!"
데스데모나의 사랑을 고마워하고 그녀를 사랑하며 행복해하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는 오델로의약점을 알고 있던 이아고는 마지막으로 오델로의 가장 불안한 부분을 헤집는다.
"부인은 왜 같은 나라 사람, 같은 피부색, 같은 문벌을 자랑하는 사내를 남편으로 고르지 않았을까요? 뭔가 이상하죠. 이러다 차차 정신을 차려 어느날 장군님의 얼굴을 자기나라 사람과 비교해보고, 혹시나 후회하게 되지는 않을까요? 저는 그게 걱정이네요."
이아고는 오델로와의 이 짧은 대화 -그저, "정말그렇다고 생각해? 네가 아는게 진실이라고 생각해?"하는질문을 반복하는-로, 그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오델로의 본성을끄집어 내는데 성공한다.
방금전까지도 사랑의 환희를 노래하던 오델로가 "내가 왜 결혼을 했을까. 분명 저녀석이 나보다 무언가 더 잘 알고 있는것 같은데"하며불안해하고, 이어서 "혹시 내 얼굴이 검고, 한량들의 우아한 태도를 갖추지 못했다고 해서, 또는 내 나이가 이미한창인 시기를 넘겼다해서" 그녀가 자신을 떠나게 될까봐 걱정하기 시작했으며, 그런 두려운 상상 속에서 그녀를 증오하고, 저주하며 그녀를 완전히소유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탄식하기에 이른다. 정말로, 아무일도일어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이아고가 그의 약점을 건드려준것 뿐인데, 오델로가외치는 대사는 이렇다.
"아 저주스런 결혼이여, 아름다운 여자를 제것이라고입으로는 큰소리 치지만 마음속까지 내것으로 만들수는 없단말인가!"
이렇게 뜨겁고, 불안하며,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오델로 식의 사랑. 그리고 이어지는 폭력적인 태도. 그것은동서고금 막론하고 자존감 약한 사내들이 '사랑'이라는 눈에보이지 않는 어려운 관계로 들어와 불안할 때 보이는 흔한 풍경이다. 하여, 이 불안한 사내를 전적으로 믿고 사랑했던 데스데모나는, 남편의 세계인먼 타향, 낯선 전지에서 자신이 모든것을 버리고 열렬히 사랑했던 남자의 손에 목졸려 죽임을 당한다. 첫날밤 사랑을 나누었던 그 홑이불 위에서.
그녀는 자신을 죽이려고 달려드는 오델로에게 말한다.
"저에게 죄가 있다면, 당신을 사랑한것 뿐입니다."
데스데모나의 목을 졸라 그녀의 숨을 끊은 것은 분명 오델로다.
그러나, 오델로에게 거짓말과 거짓증거를 건네서 오델로를 미치게 한 것은 이아고다.
그리고, 이아고의 악행에 날개를 달아준건 그의 아내이자 데스데모나의 여종인 에밀리어다. 이아고의 요구에 따라 에밀리어는 데스데모나의 손수건을 몰래 주워서 이아고에게 넘겼고, 이 손수건을 손에 넣은 이아고는그것을 자신의 악행의 중요한 소품으로 사용하여 오델로의 의심에 쐐기를 박았다.
그런데, 데스데모나가 늘 소중하게 간직하던 손수건을 떨어뜨려서 이아고의 손으로 넘어가게 된 계기를만든것은 묘하게도 오델로 자신이다. 아내를 의심하기 시작하던 오델로가 머리가 아프다고 하자, 그를 사랑하는 데스데모나는 자신의 손수건으로 오델로의 머리를 매어주려고 했고,이미 그녀를 불신하고 있던 오델로는 그녀의 친절을 거절하며 그 손을 쳐버렸다. 손수건은이 순간, 바닥에 떨어져 에밀리어에게로, 또 이아고에게로넘어간다. 오델로를 미치게 한, 아내의 부정의 증거가 되는 '손수건'은 오델로 자신이 내친것이다.
사랑과 불안, 증오와 욕망의 광증 속에서 오델로가 데스데모나를 죽인 후, 한발 늦게 살인의 현장에 도착한 여종 에밀리어가 죽어가는 데스데모나에게 대체 누가 이런짓을 했느냐고 물을 때, 데스데모나는 죽어가면서도, 오델로에 대한 사랑을 접지 않는다.
"아무도 아니야. 내 자신이 한짓이야. 안녕.."
남편에게 목졸려 죽어가던 데스데모나의 이 마지막 대사를 보면, 세익스피어가 그녀를 무엇으로 그리려고했는지 확연해진다. 세익스피어는 <오델로>에서 '이아고'라는 아주 현실적이면서도 악의 상징이 되는 인물과, 고귀함과 순수의 상징인 '데스데모나'를 양 극단에 배치한 후, 보통 사람, 즉, '조금만 더 자신의 약점을 이겨내려고 노력했다면 고귀해질수도있었을 인물'인 오델로와 각종 허약하고 이기적인 사람들을 직조해, 그들모두가 이아고에게 영향받아 데스데모나를 죽이는 데에 일조하게하는 이야기를 구성했다.
그녀의 비극에 일부라도 그녀의 책임이 있다면, 사랑의 힘을 과신했다는 것일까. 아니면, 인간이 그닥 믿을 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몰랐던 순진한세계관을 탓해야 할까. 혹은 동정하고 시혜를 베푸는것 정도로 끝냈어야 할 부족한 상대를 알아보지 못하고동등하게 사랑한 것이 죄가 될까.
그럴 수는 없을 것 같다. 이 극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혼으로 신의를 지키며 선한것들의 정당함을믿고 있는 것은 데스데모나 뿐이다. 그녀는 '상함없는 영혼'을 대변하고 있고, 그런 그녀가 '누구'의 '무엇'에 의해 파괴되어비극적 희생을 치르게는지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오델로>의주제일 것이다.
고귀한 사랑, 그것은 쉽게 얻을 수는 있어도 쉽게 지켜낼 수는 없다는 것. 그리고 숭고한 순수를 지향한다해도, 끊임없이 인간의 허약한 부분을공격하는 악한것들에게 틈을 내주었을 때, 인간이란 얼마나 무참하게 망가지며 그 자신이 악의 수행자가 될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비극 <오델로>.
우리 모두가 '데스데모나'를 사랑할 수도, 죽일 수 있는 '오델로'임을자각하게 한다.
-세종, 문화공간, 9월호
덧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