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담] 결혼에 대한 커밍아웃 다이어리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어렸을 땐 착했다. (믿어줘야할텐데...--;)

나는 옳은 것을 좋아했고, 어울림과 하나됨을 중요하게 여겼으며,
정당함과 평등함을 꿈꿨고, 희생의 가치를 숭고하게 여겼다.
정말, 착하지 않은가?

누군가 나를 진보적이었다고 기억한다면, 그건 단지
내가 윤리적, 도덕적으로 '옳은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벌였던 온갖 '옳지 못한 것'에 대한 싸움들 때문일 것이다.
혹은 정당함과 평등함을 염원했기 때문에 벌였던 온갖 '부당함'에 대한 싸움들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태생적으로 진보적일 수 없는 사람이다.

3대째 내려오는 뿌리깊은 기독교적인 세계관과 가치 속에서 교육받아왔고, 그것들은 여전히 내 의식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다행히 내 부모의 신앙이 매우 건강하고 진실했기 때문에, 나는 청년기를 지나면서도 '신앙의 세계'와 '삶의 세계'간의 간극 때문에 갈등하거나 고민하지는 않을 수 있었다.)

착했을 때, 그러니까 어렸을 때의 나는
'가정'이라는 단위공동체의 소중하고 고귀한 가치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결혼'이라는 제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것들은, 성숙한 인내와 아름다운 희생으로 단단히 뿌리내릴 수 있는 것이며
그렇게 '인내와 희생'으로 뿌리내린 '가정'이나 '결혼'은 대단히 찬란한 유토피아처럼 느껴졌다.

내 부모의 사는 모습을 지켜보며,
부부를 부부이게 하는 것은 '진심'과 '서로간의 존경'과 '인내'와 '희생'이라는걸 비교적 일찍 깨달았다.
그 말은, '사랑'이라는 달콤한 감정만이 부부를 부부이게 하는게 아니라는 것을 일찌감치 접수했다는 말이다.
어린 내가 보기에도 내 부모는 언제나 갈등하고, 논쟁하고, 맘 상했다가, 무엇인가 깨닫고는, 미안해하고, 화해하고, 서로에 대해 한가지씩 더 알아가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문화적인 차이나 취향의 차이가 현격했기 때문에 자주 벌어지는 갈등상황에도
(제법 심하게 갈등하며 맘상해하고 있을 때조차도), 그분들이 극단적인 파국으로 치닫지 않았던 까닭은 서로간에 어떤 신뢰와 존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 맘에는 들지 않지만, 그가 존경할 만한 인격이라는 것,
내 방식을 따라주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와 내가 '진심의 영역'에서 싸우고 있다는 것.
그분들이 이 두가지 믿음을 바탕으로 부부라는 관계를, 가정이라는 단위를 지켜냈다.
그 덕분에 나는 멀쩡한 가정에서 자랄 수 있었고, 멀쩡한 '양친부모' 밑에서 자랄 수 있었던 것이다.


집요한 관찰과 부단한 질문을 통해,
'결혼'이나 '가정'이라는 게, 달콤한 사랑만으로 지켜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은 나는
부모의 '인내와 희생'으로 지켜진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주는 안전함을 만끽하며 자랐다는 것에 일종의 부채감을 가졌었다. 나 역시 '인내와 희생'으로 가정을 이루고 지켜서, 내 아이에게 '안전함과 균형'이 주는 행복을 맛보게 해야하는 것이 내 임무인것만 같았다.
얼마나 알토란같이 착하고 건강한 '결혼관'을 가졌던 소녀인가 말이다.
(이쯤되면, 어렸을 땐 착했었다는 내 말을 믿어주겠지.)


그러나.

어찌어찌하다보니 지금 나는 서른 네살의 비혼처녀극작가가 되어있다.
나는 독신주의자였던 적이 없고, 결혼을 안하겠다고 마음 먹은 적도 없다.
결혼을 하자는 사람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같이 살고 싶은 애인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게다가 나는 아이도 좋아하고, 누누히 말했다시피 좋은 가정을 꾸리는 것을 꿈꾸던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내가 결혼을 못한, 안한, 할 수 없을 이유는 '내가 더이상 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엇, 이 말은 너무 패배적인 느낌을 준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해야겠다.
내가 '비혼'인 이유는 공익을 위해서다.
(믿어줘야 할텐데. --; )


무슨 말이냐하면,
나는 여전히 가정이란 '인내와 희생'으로만 지켜진다고 생각하는데,
내 에너지를 '인내와 희생'에 써버리는게 아깝다고 생각하는, (착하지 않은)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말이다.
바꾸어 말하면, 내가 '인내와 희생'에 써버릴 에너지로 작품 하나를 더 생산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 한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공익을 우선시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말이다.

때로는 비혼인 내 상태가 대단히 지겹고, 외롭고, 슬프고, 때때로 공포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그럴때마다, 스스로에게 묻는다.
'착해지는게 쉽니, 지겹고외롭고슬프고공포스러운걸 견디는게 쉽니?'
그러면, 답은 간단해진다.
이제와서 착해지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착해지지 않아도 같이 살 수 있는 '남자'를 만난다는 건, 로또2등 당첨과 같고
착해지지 않아도 나를 공격하지 않을 '시집'을 만난다는 건, 로또1등 당첨과 같다.


로또는 '혹시나, 운이 좋다면...' 이뤄질 지도 모르는 행운이지
'반드시, 열심히 노력해서...'이룰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누구나 심심할때 번쯤 꿈꿔보는 로또같은 것.
이 가을, 고백하자면, 나는 늘 로또를 꿈꾸듯 결혼을 꿈꾼다.
결혼 따위 하지 않겠어! 주먹 불끈 쥐고 미리 팍팍한 삶을 살 생각도 없고
그렇다고 결혼을 위해 착해질 생각도 없으니,
내게 '결혼'이란, '365일 즐거운 상상, 로또!' 바로 그것과 같은게 아닐까.


-담담

덧글

  • 2006/09/22 21:00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A-Typical 2006/09/23 10:26 # 답글

    공익을 위해 외롭고 슬프고 때때로 공포스러운 상황을 견디고 있다니... 착한 분이 분명하네요.
  • 담담 2006/09/23 13:16 # 답글

    비밀글 /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구나. ㅜ.ㅡ
    에이티피걸님 / 하핫, 그렇게되나요. ㅡㅡ+
  • 행크 2008/06/29 14:56 # 답글

    한 시간째, 근사한 글들에 끌려 읽고 있는데, 여기쯤이 좋겠군요.

    선명한 칼날을 갖고 계시네요. 수사로 때우는 얄팍함이 아닌, 몽땅 정리되는 한 칼.
    로또 2등, 멋져요.
    로또 1등, 모든 걸 고민하느라 지친 완벽주의자의 유레카!

    칼날, 마구 휘둘러 주세요. 저 가끔 와서 유레카! 하고 갈께요.
  • 담담 2008/07/05 20:08 #

    간만에 이 집, 이제, 정리해야하는걸까.. 하며 들어왔다가 행크님 덧글 덕분에 저도 예전 글들 쭉 읽어봤네요.

    말을 아꼈던 일년,
    자주 쓰던 칼날 무디게 하면서, 무언가 다른걸 찾아보려고 했었는데,
    글쎄요... 무언가 다른걸 찾은건지 못 찾은건지는
    다시 무언가 '말'할 용기를 내어봐야 확인할 수 있을것 같으네요.

    님의 방문과 덧글의 타이밍이 제겐 참 특별했답니다. 종종 놀러오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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